흙탕물의 원인을 없애면 항상 맑을 텐데…

필사 32일째.

필사를 끝내고 한 줄 적었다.

“흙탕물이 가라앉는 느낌. 그 흙탕물의 원인을 없애면 항상 마음이 맑을 텐데…”

쓰고 나서 한참을 그 문장을 바라봤다.

32일 만에 뭔가 이상했다.

나는 오늘 이런 문장을 필사했다.

“내 입장을 버리고 실상의 측면에서 본다면, 세상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상을 깨고 한번 물러나서 바라보면,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이 생기든지 미워하거나 원망할 일이 없습니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옮겨 적는 동안 마음이 조용해졌다.

마음속 흙탕물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썼다.

원인을 없애면 항상 맑을 텐데…

불교에서는 마음의 불순물을 삼독(三毒)이라고 부른다.

탐(貪) — 갖고 싶음.

진(瞋) — 밀어내고 싶음.

치(癡) — 있는 그대로 못 봄.

세 가지 모두 없애야 할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수행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번뇌를 끊으려 하지 말라. 끊으려는 그 마음이 또 하나의 번뇌다.”

없애려는 의지 자체가, 흙탕물을 휘젓는 손이라는 것이다.

장자는 아예 다른 질문을 던진다.

흙탕물이 나쁜 건가?

맑은 물은 좋고, 흙탕물은 나쁘다는 그 판단. 옳고 그름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세상을 재단하는 것. 필사한 문장 그대로다. 그것이 괴로움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물고기는 흙탕물에서도 산다.

장자의 언어로 하면 물화(物化). 내가 흙탕물과 하나가 되는 순간, 불순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다.

노자는 더 간단하다.

致虛極, 守靜篤.

비움을 극에 이르게 하고, 고요함을 두텁게 지켜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흙탕물도 건드리지 않으면 스스로 가라앉는다. 맑게 하려는 의지를 내려놓는 것. 그것이 무위(無爲)다.

그러니까 세 전통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원인을 없애려는 그 마음이, 원인이라고.

나는 필사를 마치고 흙탕물이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 고요한 순간에, 나는 다시 손을 뻗어 휘저었다.

원인을 없애면 맑을 텐데.

필사가 끝나는 순간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

노트를 덮고 나서도, 가라앉힌 채로 있을 수 있는가.

그게 32일째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