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말이야, 노력하는 사람한테 우연이란 다리를 놓아주는 거야.” 영화 〈엽기적인 그녀〉 중에서

쉰이 넘으면 ‘우연’이라는 단어가 좀 다르게 들린다.

스무 살엔 우연이 낭만이었다. 지하철에서 눈이 마주치는 것,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비 오는 날 하필 같은 처마 밑에 서 있는 것. 그때는 그런 게 다 운명 같았다. 영화 한 편이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견우가 술 취한 그녀를 업고 여관까지 걸어간 것도,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엇갈린 것도, 결국 고모의 소개팅 자리에서 다시 만난 것도 다 우연이었고, 다 운명이었다.

그런데 쉰이 넘으면 안다. 우연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걸.

불교에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때가 되어야 맺어지는 인연. 아무리 애를 써도 때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고, 반대로 때가 되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씨앗을 심어놓고 매일 잡아당긴다고 싹이 빨리 트는 게 아니듯, 인연도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이 하나 있다.

기다린다는 건,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이 아니다.

견우는 기다렸다. 2년을 기다렸다. 약속한 나무 아래에 혼자 서서, 그녀가 묻어둔 타임캡슐을 꺼내 읽었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거기서 끝이다. 우연은 끝났고, 인연도 끊어졌다고 생각할 만했다.

그런데 견우는 그 뒤에도 벼락 맞아 죽은 나무를 대신해 새 나무를 심었다. 어디서 찾았는지 똑같이 생긴 나무를. “나무가 죽은 걸 알면 가슴 아파할 사람이 있다면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건 우연을 기다린 게 아니다. 우연이 찾아올 자리를 만들어 놓은 거다.

이 업계에서 24년을 살았다. 롯데건설에서 18년, 창업하고 6년. 재개발·재건축이라는 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조합장을 만나고, 시공사를 매칭하고, 입찰을 기획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우연이 있었다. 하필 그날 그 자리에 있어서, 하필 그 사람이 내 전화를 받아서, 하필 그 타이밍에 입찰 공고가 나서.

돌이켜보면 전부 시절인연이었다.

그런데 그 우연들이 나를 찾아온 건, 내가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에. 새벽에. 주말에. 남들이 안 간다는 곳에. 견우가 나무를 심어놓은 것처럼, 나도 매번 거기 서 있었다. 우연이 지나가면 잡을 수 있도록.

*“우연이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랍니다.”*

영화 마지막, 견우의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이 한 마디. 스물여섯에는 그저 멋있는 대사였다. 쉰둘에 들으면 뼈가 시리다.

요즘 가끔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시절인연은 뭐였을까.

첫사랑을 만난 것? 롯데건설에 들어간 것? 퇴사하고 지 플래닉을 차린 것?

아마 전부 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우연의 밑바닥에는, 벼락 맞은 자리에 묵묵히 새 나무를 심던 견우 같은 시간들이 깔려 있다. 화려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심지어 허탕으로 끝날 수도 있는 시간들.

그녀는 영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못 믿겠지만… 나, 미래인을 만난 것 같아. 너의 미래 말이야.”

시절인연이란 그런 것 같다.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지만,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놓아준 다리. 오늘 심는 나무가, 내일의 누군가를 울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우연을 탓하지 말자. 인연을 재촉하지도 말자.

다만 거기, 서 있자.

나무 아래에.

때가 되면, 온다.